
[HAN] GLASS
규칙적인 모터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 두 인영이 앉아 있다.
“아직도 에어컨도 안 틀고 지내나요? 미스타. 억지도 수준급이네요. 캐시미어 옷을 고집하는 만큼 이해는 합니다만.”
“후고 놈처럼 옷에 구멍을 뚫을 수도 없는 노릇이잖냐.”
죠르노의 옆자리. 한량처럼 바닥에 늘어져있던 미스타는 그리 답하곤 잇차, 반쯤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아예 상의를 벗었다. 탄탄하게 잘 짜여진 근육과 십일자(11)로 떨어지는 복부에 아닌 척 시선을 주고 있던 죠르노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미스타는 저를 바라보는 죠르노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예 일어선 뒤, 죠르노의 앞을 터덜터덜 지나 샤워실로 향했다.
등 뒤에서 죠르노의 목소리가 미스타를 잡는다.
“이번 휴가에는 바다에 갈까요.”
미스타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시큰둥하게 짝다리를 짚으며 멈춰 있자 끈질기게 목소리가 이어진다.
“네아폴리스가 해안도시라 질리도록 보는 바다지만 휴양지는 또 다르잖아요. 나름의 낭만도 있고.”
적어도 귀도 미스타가 아는 죠르노 죠바나는 계획하지 않은 일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2의 해결책’을 내놓기보다 더 고집하는 모습이라니. 분명 준비한 무언가가 있는 거겠지. 연하의 애인은 이런 모습이 특히나 귀여웠다. 싫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반응이 궁금했지만 딱히 죠르노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그 정도는 속아 넘어가 주기로 했다. ─또 어떤 식으로 속에 담아두고 앙갚음을 할지도 모르니까, 라고 생각하며─ 알겠으니 잘 준비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미스타는 샤워실 문을 닫고 들어갔다. 머지않아 모터 소리가 머물던 집 안에 샤워기의 물소리가 들어찼다. 어린 애인이 애써 준비한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기대가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감싸는 거품같이 불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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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파시오네와 그의 오른팔─넘버 쓰리. 2라는 숫자는 곱하면 4가 되어버리니까─의 휴가. 조직의 핵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들이 동시에 자리를 비우는 건 사실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 배후에는 죠르노 죠바나가 파시오네의 보스가 아닐 것이라 믿는 뭇사람들의 의심이 깔려있기도 했다. 어찌되었건 진짜 보스가 거짓이라 자진해 믿어주니 죠바나 본인과 주변인들에게는 도리어 편할 따름이었다.
짐을 데스크에 맡겨두곤 로비 외벽에 마련된 테라스에 죠르노가 자리를 잡는다. 뒤따라 테라스로 발을 옮긴 미스타도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맞은편에 앉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진 않네.”
“일부러 그랬습니다. 파시오네에 있으면 사람들이 많아서 미스타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 어려우니까.”
이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어요? 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아도 연상의 애인은 잘 캐치해냈을 것이다. 미스타는 괜히 멋쩍어졌는지 슬쩍 웃고는 그러냐며 대꾸했다. 표정을 살피니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야 당연하지, 연인과 같은 생각을 했다는 생각에 죠르노는 마음 한쪽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평온했다.
어느새 죠르노와 미스타가 주문했던 음료가 준비되었는지 저벅이는 소리와 함께 레스토랑 서버가 시선 끝에 들어온다. 오늘의 추천 디저트를 올린 디시와 음료를 테이블 위에 두곤 짧게 인사하자 미스타가 그라치에라고 답하며 제 몫의 생딸기 프라푸치노를 들어올려 보였다.
“어쩌면요.”
죠르노는 스스로의 턱을 손으로 받치곤 미스타를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슬쩍 해변 쪽으로 돌렸다.
“미스타.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은…… 아니, 저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태어난 게 아닐까요?”
“……! 그게 무슨 낯부끄러운 소리냐? 너무 구닥다리 작업 대사 같은데.”
갑작스러운 고백에 마시던 음료를 잘못 삼킬 뻔한 미스타가 목을 움켜쥐고 답하자 ‘원래 고전이 시대를 막론하고 잘 통하는 법이라고요.’라는 말이 돌아온다. 어째 말투에 툴툴거림이 묻어 있어 미스타가 죠르노를 쳐다보자, 그의 귓가가 붉다. 아직 제 솔직한 감정을 숨기는 데는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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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지빛으로 모래사장을 내리쬐는 태양은 뜨겁지 않았다. 청량한 공기에 바다가 풍기는 기분 좋은 짠내와 섞여 절로 입가에 웃음을 자아냈다. 미스타가 양 팔을 벌려 눈을 감고 바람을 느끼고 있자니 며칠 전 들뜬 마음에 샀던 밀짚모자가 바람결에 날려 공중에 붕 뜬다.
“엇, 미스타!”
먼저 알아차린 죠르노가 손을 뻗어보지만 그 자리에서 잡아채기엔 역부족이었다. 밀짚모자 안에 뭐가 있었던 것 같아 죠르노가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모자를 쳐다보았다.
“이이이이이~ 하아아아!”
“섹스 피스톨즈! 이 녀석들!”
섹스 피스톨즈들은 미스타의 들뜬 기분을 대변이라도 하듯 모자를 들고 각자 저마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씨름을 하더니, 곧 제 풀에 지쳐 다시 리볼버 안으로 몸을 누였다. 그 모습까지 지켜보고 난 뒤 미스타는 모자를 고쳐쓰곤 죠르노에게 시선을 옮겼다.
섹스 피스톨즈들과 함께 있으면 이런 헤프닝이 종종 일어난다는 생각을 둘 다 하고 있는 듯 했다. 그만큼 미스타도 들떴다는 뜻이겠지. 죠르노는 제 연인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바다를 쳐다봤다.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맞춰 바람이 머리카락을 간질인다. 선율을 허공에 옮겨둔 듯 바람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탁 트인 수평선이 눈을 즐겁게 한다. 주변에는 호텔을 제외한 커다란 도시나 건물도 없어서, 일상에서 느낄 수 없는 휴가지만의 색채가 느껴졌다.
해변에 마련된 선탠 체어에 미스타가 등이 보이게 눕자 죠르노가 준비해온 가방에서 자외선 차단제를 꺼내 미스타의 등에 이리저리 발라준다. 가방 안에 얼음물이 있어서 그런지 등에 얹힌 로션이 체온보다 낮았던 탓에 미스타의 근육이 조금씩 흠칫거렸다. 죠르노는 즐거운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어깨죽지에서 둥글게 움직이던 손바닥을 곧은 척추를 따라 일자로 쭉 내려버린다. 어라라?
“어이, 죠르노!”
분명 엉덩이골 쪽으로 손을 넣었다. 넣기만 했다면 잠자코 있었을 미스타였으나 죠르노가 더 아래로 손을 뻗어 탐스럽게 올라간 엉덩이를 움켜쥔 게 문제였다. 미스타가 당황하며 죠르노의 손목을 잡자,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을 뚝 뗀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로션 형태보다 오일 쪽이 더 좋습니다.”
“그러면 오일을 사지 그랬냐?”
“그러게요. 밤에는 오일을 발라드릴까요?”
싫다고 할 줄 알았지만 미스타는 의외로 쉽게 승낙했다. 오일이 좋다는 건 당신 몸을 더 매끄럽게 만질 수 있어서라고요……. 미스타가 기대하겠다는 말까지 남겨버리니 죠르노는 기뻐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가 되어 잠자코 있었다. 부하를 시켜서 호텔 객실 안에 오일을 준비해 두라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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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던 바다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 죠르노와 미스타는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했다. 그 날 바다에 뜬 튜브의 개수가 네 개 인 탓이었다.
내심 기대를 했는지 표정이 뚱해진 죠르노에게 오늘만 시간이 있는 건 아니라며 미스타가 어떻게든 달래 보려 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이런 면에서는 제가 네 번째를 대신할 수가 없네요.’라는 말이었다. 어쩐지 답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어쩌라고? ‘4’는 말해봤자 입만 아플 정도로 무조건적인 불운의 수였다. 오히려 오늘 입수를 피하는 건 죠르노에게도 좋을 일이었다. 미스타는 그저 ‘한 인간에게만 의미가 있는 행동’이라고 믿는 죠르노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죠르노는 쉬이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미스타의 ‘럭키 보이’니까 믿고 들어가면 안 되냐며 미스타를 설득하려 했다. 그렇지만 미스타가 ‘4’는 불길하다고 계속해서 말하지 않았냐며 다시 길길이 날뛰었다.
놀랍게도 미스타의 촉은 정확했는지 잠시 후 한 남자가 해파리에 쏘였다며 급히 실려가는 걸 보고 죠르노는 조용해졌다. 이내 입수에 대한 단어를 잊어먹기라도 한 듯 둘은 다른 주제로 대화를 이어가며 해변가를 걷기 시작했다.
분홍빛과 주홍빛이 섞여 낭만적인 감상을 자아내던 노을이 지고, 서서히── “베네치아가 떠오르네요.”
수평선 어드메를 바라보던 죠르노가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했다.
“베네치아에 가면 아침은 치케티(베네치아의 전통 핑거 푸드로, 접시에 샌드위치, 올리브 또는 야채, 삶은 계란, 해산물, 고기, 수프 등으로 이루어진 작은 코스 요리이다.), 점심으로는 해산물 요리를 잔뜩 먹어보려고 했는데. ‘화이트 앨범’이라고 했던가.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는 아니었지.”
“어떤 길이든 가는 길에는 상흔이 남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누가 더 굳게 다지고 일어나는가……, 그 편이 중요하겠죠.”
몇 년 전처럼 아득하지만 사실 몇 달 전이었음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경험들을 나눈 둘이었다. 죠르노의 대답을 듣고는 미스타가 죠르노의 목에 한쪽 팔을 둘렀다.
“그래서 너를 좋아해.”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죠르노가 놀란 눈으로 미스타를 바라보자 씩 웃는 저의 연인이 시야에 가득찬다.
아마 이 사람은 본인의 이런 말과, 표정과, 행동이 얼마나 빛나고 사랑스러운지, 그리고 죠르노 자신을 들뜨게 하는지 모를 것이다. 아직 태양이 붉게 세상을 물들이고 있어 바뀐 저의 뺨의 색을 연인에게 비밀로 해 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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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밤이 완연히 깊어졌다. 어스름한 바다 앞에 두 인영이 서자 낮의 풍경과는 다르게 일렁이는 수면이 하늘 위에 올라탄 달빛을 은은히 반사해낸다. 파도가 하얀 빛으로 부서졌으나 그와 대조되는 검은 수면이 죠르노의 시선을 끈다. 얼마나 깊은지 가늠하기 어려운 검정. 잡힐 듯 하면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연인과 닮아 있어 죠르노는 제 연인을 다시 눈으로 좇았다.
미스타는 혼자서 무어를 골똘히 생각하는지 죠르노가 잠시 뒤로 눈을 돌린 사이 열 발자국은 더 앞에 있었다.
귀도 미스타.
오롯이 서 있는 자의 등은 역삼각형으로 잘 빠져있다는 느낌을 줌과 동시에 굳건하고 처연한 감이 있었다.
그는 혼자였다. 죠르노 죠바나는 그렇게 감상을 남겼다. 연인이라는 단어는 둘을 하나로 엮어주는 듯 했으나 인간은 본래 그러한 운명運命을 타고 나는 법이었다. 다만 그 사실이 사람에 따라 다른 감정으로 다가올 뿐이었기에 죠르노 죠바나는 애인의 모든 생각을 헤아릴 수 없음에 자라난 욕심을 느리게나마 눈치채게 된 것이다.
미스타는 좀처럼 자신의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스타나 죠르노나, 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들 이를 안타깝게 여길 혈육은 없었다.
갱스터라는 게 이런 걸까. 허나 죠르노는 사랑하는 혈육이 있음에도 충성을 다하는 조직원들을 수도 없이 봐 왔다. 어떤 이는 돈벌이로 이 생활을 시작했고 또 다른 이는 검은 권력을 향해 손을 뻗으며 그림자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허나 모두에게는 상처가 있었다. ‘팀’으로 이루어진 부차라티 일행을 떠올리며 죠르노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바키오, 나란차, 그리고 부차라티. 트리시와 후고, 미스타…….
이제 아무도 우리를 더 이상 상처 입힐 수 없도록,
결코.
죠르노는 저만치 앞서 가는 미스타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발자국을 따라 파도의 노래에 맞춰 걸음을 조심스레 옮기자 이내 한쪽 시선 끝에 그림자가 진다. 미스타였다.
우리는 서로 참 닮아 있죠. 이렇게나 다른 사람인데. 둘만 알 수 있는 밀어를 속삭이며 달이 비추는 그림자가 둘의 입술처럼 하나로 포개어졌다. 바닷바람은 나부끼며 둘의 체온을 앗아가려 했으나 이미 맞닿은 숨과 입술이 둘을 엮어 서로만을 인지하게 만들었다. 철썩이는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파도 소리도 이내 둘이 내뱉는 열기를 띤 숨에 묻혀 움직이는 세상을 멈추고 온전히 둘만을 재창조한다.
나는 당신이 아니면 안 되나 봐. 죠르노 죠바나는 어린 시절 자신이 지나온 것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 그의 생은 한 사내의 친절로 인해 다시 활기를 얻었기 때문에 그 이전의 것은 어찌되었든 상관이 없던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제 죠르노 죠바나에게는 생을 다해 끌어안아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이는 조각들 사이 짝을 찾지 못할 것 같았던 특이한 모양의 파편이 자석에 끌리듯이 온전히 맞는 상대를 만난 감정이었다.
이제 어둠이 삼키고 있었던 두 명 분의 발자국을 태양이 밝힐 때였다. 새 아침의 시작이다, 당신과 함께 할.